2011. 8. 29. 22:46

2015.7.19 늦게 댓글을 보고 출처를 넣습니다.

http://dvdprime.donga.com/g5/bbs/board.php?bo_table=comm&wr_id=6457036



음악으로 먹고 살 수 있는가

우리들의 시대에 음악의 파도가 밀려오다 

팝뮤직이 제일이라고 할까 음악이 문화의 중심이었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1950년대부터 60년대, 70년대까지 그것이 지속되는데 특히 60년대에는 스테레오나 LP레코드의 출현에 의해 음질이 혁명적으로 진화했습니다. 그리고 비틀즈로 대표되는 로큰롤이 유입되었습니다. 그 시절에 저는 초등·중·고등학생으로 가장 감수성이 풍부하던 시절을 보냈기에 음악이 가장 소중한것이었습니다. 레코드를 듣기위해서는 집에 돌아와서 그 자리에 있지 않으면 안 되기에 음악과 대치하며 집중했습니다. 그랬더니 거기서 "소우주" 가 출연한것이었습니다(웃음) . 혼자서 음악을 대하고 있으니 우주끝까지 끌려갈듯한 깊은 감동이 있었습니다. 저는 뒤집어쓰듯 음악을 듣던 아이였습니다. 

중·고등학교 6년간 브라스밴드에서 활동하며 드럼과 퍼커션만은 선생님께 배웠지만 그뿐입니다. 친구들과 밴드를 결성하거나 해서 음악은 즐기긴했지만 뮤지션이 될 생각은 추호도 없었고 학구적인 교육도 받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시대의 힘은 크다고 말해야될까요. 중학교를 졸업할때까지 이과지향이었는데 고등학교에서 이탈했습니다. 음악저작권등을 배우고자 대학교에 진학했지만 고작 3개월만에 좌절. 결국 음악 그 자체로 살아가고싶다는 유혹에는 저항하지 못했습니다. 저희들은 70년 안보라는 정치혼란에 얽힌 세대입니다. 기성의 가치관에 강한 반발이 있었고 음악이 문화의 주류라는 시대속에서 인생에 얽힌 음악의 힘이 지금과는 완전히 틀려서 중도이탈한 인간은 대부분 뮤지션이나 그 관계자가 됐습니다. 혹시 제가 3년 빨리, 아니면 3년 늦게 태어났다면 절대로 뮤지션이 되지는 않았을겁니다. 시대가 저를 음악의 길로 인도했다고 생각합니다. 


"30살까지 목표를" 부모님의 말씀이 가슴에 남았다 

시작은 "슈거 베이브" 라는 밴드입니다. "SONGS" 라는 앨범도 냈지만 그 레코드 회사가 3개월만에 망해서 저희들은 인세 한푼도 못 받았습니다. 밴드일은 부정기적이어서 아르바이트도 할 수 없어서 곤궁했습니다. 그 때 CM으로 채용해준 사람이 있어서 3시간에 곡, 편곡, 노래를 포함 15초 CM 한편을 완성하는데 4만엔 언저리를 받았습니다. 그것이 인생 첫 음악수입(웃음) . 그 후 CM으로 고용해주는 사람이 늘어서 어떻게든 먹고 살 수 있게 됐습니다. 그 밖에도 먹고살기위해 코러스 보이, 작곡, 편곡등 뭐든지 수용했는데 그 경험이 나중에 스스로를 구하게됐습니다. 음악업계의 온갖 주문에 현명히 대처할 수 있던것등 결국 저를 성장시켜줬다고 생각합니다. 음악이란 예상하지도 못한 세계에 몰입한 외동아들에게 부모님은 "30살까지는 좋다. 하지만 30살이 되면 이것이 자신 평생의 직업이라는 목표를 확정지어라" 라는 말씀을 계속하셔서 먹고살기위한 음악이란 무엇인가 생각하고 저는 아티스트 기분으로 들뜨지 않을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익명으로 할 수 있는 좋은 직업" 이 기본 

작곡은 괴롭지만 타협은 하지 않는다 

무엇을 위해 음악을 하는가, 표현자로서 어떤 음악활동을 할 것인가. 저는 그런 자신에 대한 의문을 늘 던져왔습니다. 공명(功名) 을 위해서라던가 돈벌이 수단으로서 음악을 선택한것이 아닌데다가 자신을 표현하는 필연성을 제 나름대로 생각하면서 살아왔습니다. 신인밴드들이 자주 넘어가는 표현이 "지금만 조금 타협하자" "잘 팔리면 할 수 있는것을 할 수 있다" 라는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자신이 믿는것을 관철하며 성공하지 못한다면 그 이후에도 절대로 하고싶은것은 못 합니다. 하기싫은것을 억지로 강요당해서 팔려도 의미가 없습니다. 그런 음악적 신념, 긍지를 강하게 지키는 자체가 없으면 프로뮤지션은 오래 못 합니다. 

제 표현수단인 음악활동 이외에는 이것도 안 해 저것도 안 해 하고 안 하는것만 잔뜩인 네거티브 프로모션이 결과적으로는 저에게는 가장 잘 맞았다고 생각합니다. TVCM에 출연한 "RIDE ON TIME" 이 크게 히트해서 떴을때 조금 얼굴이 팔린것만으로 신칸센역의 매점판매원이 "아, 당신 어제 TV나왔지 나왔지" 라며 제가 어디의 누구인지는 관계없이 그저 유명인으로서 다루는겁니다(웃음) . 저는 그런것이 서투르기때문에 그 후 큰 미디어 노출은 가급적 피하며 지금까지 그렇게 하고있습니다. 부부로 CM에 출연하지 않겠냐는 권유가 있었습니다. 이틀간 꼼짝못하는 대신 상당한 개런티를 받는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런짓을 하면 제 곡을 쓸 수 없게됩니다. 곡을 쓰는것은 거창하게 이야기하자면 생명을 갉아먹는 작업이라서 곡이 나오지 않아서 괴로워할때 머리에서 떠오르니까 또 CM에 출연할까 싶기도합니다(웃음) . 곡을 쓰는것 이외에 살아갈길이 없기에 늘 저를 재촉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묵묵하고 진지하게 일하는 사람이야말로 직업인이다 

저는 아티스트라는 단어를 싫어합니다. 지식인이라던가 문화인이라던가 높은곳에서 보는 시선으로 "나는 너희들과 다르다" 라고 말하기만하는 호칭도 전혀 수용할 수 없습니다. 이름이 알려져있다는것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세상에서 묵묵하고 진지하게 일하는 사람이 가장 훌륭합니다. 그것이 저의 신념입니다. 옛날부터 하와이나 아시아등 해외공연의 권유가 잔뜩 있었지만 전혀 흥미없습니다. 그럴 시간이 있으면 일본의 어딘가에서 진지하게 일하는 팬을 위해 연주하고 노래하고 싶다. 그것이 저에게 주어진 책무라고 생각합니다. 

소목장이가 자도 아무것도 쓰지 않고 눈대중으로 자르고 붙여도 전혀 틀리지 않고 테두리를 맞춘다던가 연마기의 불꽃으로 안티몬이 몇 퍼센트 함유되어있는지 아는것같은 진정한 장인기를 보면 마음속에서 감동이 느껴집니다. 분명 그런 장인들은 유명해지는것에는 집착하지 않을겁니다.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기술을 자신의 능력이 되는한으로 추구할뿐. 그것이 직업을 지닌 인간 본연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자세는 장인입니다. 만든곡이 누군가에게 기쁨을 줄 수 있다면 그걸로 그만입니다. 이 사회는 직종에 상관없이 열심히 일하는 직업인의 노동에 의해 돌아간다고 생각합니다. 


작자는 학습을 지속해야 

혼의 외침만으로 100곡은 쓸 수 없다
 

음악세계에서는 크게 두 가지 작업방식이 있습니다. 작품을 스스로 만들어 표현하는 방식, 작자를 도와서 비지니스를 하는 방식입니다. 작자를 지향한다고 해도 로큰롤의 경우 기타코드만 세개 알면 곡을 쓸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100곡은 쓸 수 없습니다. 자신의 혼의 외침이 아무리 강렬해도 금방 한계가 오는것은 냉철한 사실입니다. 음악표현을 오래 지속하기위해서는 지속적인 훈련과 학습이 필요합니다. 이 세계는 전환이 빠르기때문에 3년정도 해서 싹이 트지 않으면 간단히 버림받습니다. 레코드 회사의 책임도 있지만 프로로서 돈을 번다는것은 어떤것인가, 취미로 하는것과 무엇이 틀린가, 젊을적부터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좋은곡을 쓸 수 있는 천재입니다" 라고 아무리 지껄여도 거기에 돈을 지불하는 사람이 없으면 자칭에 불과할뿐입니다. 반대로 500엔이라도 1천엔이라도 개런티를 받을 수 있다면 금액에 관계없이 프로페셔널의 책임과 권리가 생깁니다. 

"꿈은 반드시 이룬다" 라는 표현이 독자적으로 자립하는 시대입니다만 저는 "꿈은 이뤄지지 않을 확률이 훨씬 높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렇기에 열심히 노력해서 그 결과 꿈이 이뤄지지 않았을때에는 어떻게 할지 그것도 상정해서 일을 해야된다고 생각합니다. "꿈" 은 매력적으로 힘이 있지만 어디까지나 결과로 꿈을 처음부터 폭주시켜서는 안 됩니다. 


기술변화의 파도도 헤쳐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제가 아직 젊었던 1980년대 중반, 밀려드는 오디오 기기의 디지털화에 농락당해 화가 났습니다. 아날로그 미디어의 한계로 인한 변화가 아닌 메이커가 한계에 달한 수요를 회복하기 위해 레코드에서 CD로 디지털화를 추친한 결과, 제작과정을 근본적으로 바꾸지 않으면 안 됐고 또 그 미완성의 과정에 작자는 이리저리 휘둘렸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언제까지나 불평을 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면 팝 뮤직이라는것은 시대와 함께 살아가는 음악이기때문입니다. 

저는 장인의 혼으로 일을 하고싶다고 생각하지만 제 옛날의 가치관이나 경험치에 과도하게 집착하면 금방 시대에 뒤쳐집니다. 그것을 피하기위해서는 필사적으로 자기개혁이나 학습을 지속하는수밖에 없습니다. 이전같은 울림이 나오지 않는다던가 사소한 뉘앙스를 얻을 수 없다던가해서 그 결과 이렇게 하면 어떨까, 저렇게 하면 어떨까하며 "어떻게 하면 될까" 에 열중하던 시절도 있었지만 그렇게 헤맨것을 후회하진 않습니다. 자신의 음악성만 흔들리지 않는다면 반드시 개선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것은 음악의 작자로서 무엇이 중요한가, 자신은 이대로 괜찮은가하는 자문입니다. 기세와 열정만으로는 일은 계속되지 않습니다. 꿈을 품으면서도 냉정함도 겸비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문화를 흠집내지 않는 것 


사람의 직업에는 경의를 표하자
 

음악뿐만 아니라 영화나 소설, 회화, 스포츠등의 분야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하지만 상품으로서 파는 가운데 "세상을 바꿀 세기의 걸작" 이라던가 "수백만인을 감동시켰다" 라고 과대광고를 때리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게다가 많은 매체나 평론가로 불리는 존재도 얽혀서 과대평가를 유포하는 예도 많습니다. 그 자체는 비지니스니까 어쩔 수 없습니다. 그것은 내용과는 별도의 문제지만 선전정도가 아니라거나 과대평가가 맘에 안 든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이번에는 비판을 퍼붓습니다. 그런 과도한 칭찬과 불필요한 비판이 복잡하게 뒤얽혀서 대립할때마다 문화는 흠집나고 사람의 기분도 사나워진다고 생각됩니다. 

저는 쉰여덟이 되고 이 나이가 되서 그런대로 되도않는 비판을 신경쓰지 않고 살수있게 됐습니다. 할 수 있는것이라면 지금의 젊은 사람들에게는 그런 범위의 잡음에 지지말고 일을 해나갔으면 싶지만 안타깝게도 지금은 그렇게 하기에는 굉장히 어려운 시대입니다. 성가시게도 인간은 천번의 찬사속에서 한번의 매도를 굉장히 신경쓰는 동물이라서 그런가운데 냉정하게 자신의 일을 스스로 평가하는것은 지극히 어렵습니다. 하물며 자신의 극기심만으로 그 고통을 극복하는것은 더욱 어렵습니다. 그렇기에 직종에 상관없이 직업인이 된다면 좋고 싫음을 분명히 구별해서 다른이의 작품이나 직업에 경의를 표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나의 작품이 형태를 이루기까지 소모되는 시간이나 노력은 어설프게 볼 게 못 됩니다. 좋고 싫고가 있는것은 당연하지만 도를 넘은 평가나 비판은 문화자체를 굉장히 혼탁하게 만드는 행위입니다. 


작품을 수용하는 이가 자유롭게 느끼는것이 문화다 

노래는 한 번 세상에 나오면 제 손을 벗어납니다. 그것을 듣는분들의 공동의식이 더해져서 조금씩 만든이의 본래 의도와는 다른 의미가 부여되기 시작합니다. 제 경우 그게 가장 극단적으로 드러난것이「クリスマス·イブ」라는곡입니다. CM에 기용되어 히트하고 20년이 지난 지금도 들어주고 계십니다. 작년에 발표한「希望という名の光」라는 곡도 원래는 오키나와의 산호 양식을 자력으로 이룬분의 실화를 기반한 영화의 주제가지만 올해 3월의 동일본대지진후에는 위로의 노래로 받아들이게 됐습니다. 그것은 저에게 있어서 굉장히 의외였지만 동시에 노래가 지닌 운명이라고도 생각합니다. 

저는 국민적 스타도 아니고 TV에도 출연하지 않기에 모든 사람들을 달래주는것은 전혀 할 수 없지만 다만 지금까지 줄곧 제 노래를 들으며 생활해오신분들이 기뻐해주셨으면하는 바램뿐입니다. 자신이 다룬 작품이 그것을 필요로 하시는분들에게 제대로 전달되는것이 가장 기쁩니다. 일을 하면서 바라보는 상대는 잘 팔릴까 안 팔릴까같은 도중에 끼어드는 잡음을 뛰어넘어 어디선가 제 작품을 기다려주시는 제가 모르는 누군가입니다. 


야마시타 타츠로●싱어송라이터/음악프로듀서. 1953년생. 75년 밴드 "슈거 베이브" 로 싱글 "DOWN TOWN" , 앨범 "SONGS" 로 데뷔. 76년 앨범 "CIRCUS TOWN" 으로 솔로데뷔. 80년에 발표한 'RIDE ON TIME" 이 크게 히트하면서 떴다. 앨범 "MELODIES" (83년) 에 수록된 "크리스마스 이브" 가 89년에 오리콘차트에서 1위를 기록. 20년 이상에 걸친 차트인. 일본 굴지의 크리스마스 스탠다드 넘버가 됐다. 84년 이후, 타케우치 마리야의 전작품의 어레인지 및 프로듀스를 다루고 또 CM타이업 악곡 제작이나 타 아티스트의 악곡제공등 폭넓은 활동을 지속하고 있다. 


출처: 아사히신문

Posted by cheer one up